1. 들어가며
명상록은 자기 계발서의 조상님이라고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으로 로마의 16대 황제 이자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그의 생각이 담겨있는 짤막한 일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의 명상록을 통해 고대인들은 또 로마의 황제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를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자.
목차
1. 들어가며
2. 명상록(冥想錄) 뜻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력
4. 명상록 집필시기
5. 명상록 집필 당시 시대적 배경
5-1. BC 161년: 제16대 로마의 공동황제가 되다
5-1-1. 마르쿠스가 베루스와 공동황제로 등극시킨 이유
5-2. BC 162년: 테베레강의 대홍수, 대기근
5-3. BC 161 ~166년: 파르티아 전쟁
5-4. BC 165년 ~ 180년 경: 안토니누스 역병의 팬데믹
5-4-1.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의 이름의 유래
5-4-2.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은 무슨 병인가?
5-4-3. 안토니누스 역병의 진원지
5-5. BC 166년 경~ 180년: 1차 마르코만니 전쟁
5-5-1. 민족대이동(Migration Period)
5-5-2. 마르코만니 인의 다누비우스 강의 침공
5-6. BC 169년: 공동황제이자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 사망
5-7. BC 175년: 배신감을 느끼다, 카시우스의 반란
5-7-1. 파우스티나의 카시우스 모반 개입 설
5-8. BC 175년 경: 왕비 파우스티나의 죽음
5-8-1. 왕비 제거 설
5-9. BC 178년: 끝나지 않은 전쟁, 2차 마르코만니 전쟁
5-10. BC 180년: 평온하게 잠들지 못하다
6. 요약
7. 나가며
2. 명상록(冥想錄) 뜻
명상록은 마음 깊이 생각한 것(심사숙고)의 기록이란 뜻이다.
먼저, 명상록(冥想錄)의 뜻을 알기 위해 한자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冥想錄 명상록
冥 어두울 명
想 생각 상
錄 기록할 록
즉, 명상록이란 어둡게 하여 생각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감이 잘 안 오니 '명상'이란 단어를 먼저 살펴보자.
冥想 명상
冥 어두울 명
想 생각 상
한자를 통한 명상이란 단어의 뜻은 어두운 생각이란 뜻인데. 여기서 어두운 생각은 나쁜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생각하는 모습을 말한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눈을 뜨고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기에 명상은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진 생각, 깊은 생각을 말한다.
또한 명상록의 영어의 뜻을 살펴보면 이 책 명상록의 영어 제목은 Meditations(메디테이션즈)로, 이 단어는 Meditation은 요가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정신 수련 명상이나 정신 훈련을 말하는 것이 아닌 깊고 신중한 생각, 심사숙고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의 뜻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깊은 생각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인물일까?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력
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영어이름: Marcus Aurelius Antoninus
생년: 121. 04. 26. ~ 180. 03. 17. (58세)
국적: 로마 제국
직업: 로마 황제, 스토아 철학자
유명한 가족들:
아내로 소(少) 파우스티나(Faustina the Younger)가 있고,
아우렐리우스 후에 황제가 되는 아들 코모두스(Commodus)가 있다.
간단 이력:
121년 04월 26일 로마에서 출생
161년 03월 07일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 재위 (제16대 로마 황제)
180년 3월 17일 원인 모를 역병으로 58세의 나이로 사망
평가:
- 스토아 철학으로 국가를 통치한 철인왕 哲人王(철학자 왕)이자, 팍스 로마나(전쟁이 최소화된 평화의 로마,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다.
- 기존에 왕들들과 달리 친 아들인 코모두스가 왕위를 계승시켰고 로마가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다.
4. 명상록 집필시기
명상록의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B.C 170~180년 사이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명상록은 일기 형식이다 보니, 이 책의 집필 시기 때의 배경도 함께 알아두면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명상록의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쓸 때 날짜를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날짜 없는 일기의 모습이다.
게다가 정신적 내면의 번민과 자아성찰만 기록과 과거의 죽은 자들을 가끔 언급할 뿐, 책 속에서 사건이나 상황, 인물의 행동 등 세속적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다른 주변 인물과 상황으로 쓰인 시기조차 유추할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학자들은 그의 생애인 121~180년 중에서 170~ 180년 약 10년 사이의 중년에 들어서기 전에 쓰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5. 명상록 집필 당시 시대적 배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하 마르쿠스)가 황제도 집권당시 로마는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 역사적 흐름을 따라 그의 집필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5-1. BC 161년: 제16대 로마의 공동황제가 되다
마르쿠스는 40세의 나이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를 이어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와 로마 16대 공동황제가 되었다.
공동황제 베루스는 연설하는 것과 파티를 즐기고, 전차 경기관람 등의 향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스토아 철학의 차분하고 내성적인 아우렐리우스와 성격과 반대였다.
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황제로 두었을까?
5-1-1. 마르쿠스가 베루스와 공동황제로 등극시킨 이유
베루스가 후계자로서 황제의 자격이 충분한 것과 베루스와의 관계, 신용도, 그리고 로마 영토의 광활함이라는 4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1. 베루스는 황제의 요건이 충분했다.
베루스는 친아버지(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한 뒤, 안토니누스 피우스(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후에 제15대 로마 황제가 됨)의 후계자로 된 상태에서, 마르쿠스를 양아들과 동시에 후계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하드리아누스(제14대 로마 황제)의 양아들로 입양되었다.
비록 로마 원로원에서 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지 않았지만 베루스가 황제가 될 요건은 14대, 15대 황제의 후계자로서
이미 갖춰진 상태였다.
2. 베루스와의 인간관계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비록 피를 나눈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하드리아누스를 양아버지로 둔 형제로써의 관계였다.
그리고 신중하고 금욕적인 성격의 마르쿠스와 쾌락을 향유하는 베루스는 성격과 성향의 차이가 있어 마르쿠스가 베루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었으나 그가 죽었을 때 크게 장례를 치르고 슬퍼한 점을 보면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음을 알 수 있다.
3. 베루스의 능력과 대한 신용
베루스는 공동황제이긴 하나 사실상 마르쿠스의 명령을 듣는 일개의 신하로 활용한다. 또한 베루스는 자신의 황제직위를 남용하지 않고 마르쿠스가 명령을 잘 이행하는 신용 할 수 있는 동생이었다.
베루스는 전쟁도 성실히 이행하고 공무처리도 잘하여 마르쿠스가 베루스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일처리를 다 해놓고 놀기 때문에 못마땅하지만 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대에서 보면 베루스는 잘 놀고 일도 잘하는 유능한 사람이며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마르쿠스에게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4. 업무 분담과 통치의 효율화
로마 제국은 넓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시시콜콜 외세 침략으로 전쟁을 수시로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각종문제가 벌어지는 넓은 로마제국 영토를 황제 혼자 관리하기보다 공동황제를 둠으로써 로마 정치와 주 행정은 마르쿠스가,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베루스가 도맡아서 처리함으로 관리했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에서 아우렐리우스를 제16대 황제로 선언했으나,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황제를 거절하고, 동생 베루스와 공동황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2. BC 162년: 테베레강의 대홍수, 대기근
테베레강이 제방을 넘쳐흘러 로마 전체에 홍수가 났고 이 때문에 가축과 농사를 망쳐 나라 전체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집권한 지 1년에 닥친 재앙이었다.
5-3. BC 161 ~166년: 파르티아 전쟁
파르티아 볼로가세스 4세가 로마 위성국인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을 자신과 같은 가문인 파코루스를 왕으로 옹립시키면서 약 6년간에 벌어진 파르티아 전쟁이 전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더 큰 재앙이 마르쿠스와 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5-4. BC 165년 ~ 180년 경: 안토니누스 역병의 팬데믹
파르티아 전쟁을 끝내고,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로마 내에서 안토니우스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시체가 나뒹구는 끔찍한 모습을 이 전염병은 사망률 15%까지 되는 이 질병은 로마 전체 인구의 25%를 감염시켰고, 로마 시민들은 하루 2000명씩 죽어나갔다.
2019년에 발생한 코로나 19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안토니우스 역병은 700~800만 명의 사망자를 만드는 피해를 냈고, 아우렐리우스 또한 이 병으로 인해 죽게 됨으로써 역병문제는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게 한다.
5-4-1.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의 이름의 유래
당시 역병을 처음 기록한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의 역병, 갈렌의 역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병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때 발생하여 안토니누스(Antonine)의 역병(Plague)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 부른다.
5-4-2.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은 무슨 병인가?
이 병의 정체는 의학적 기술의 미진과 자료불분명으로 인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료들로 볼 때 천연두, 흑사병, 홍역으로 추측된다. 이 안토니누스 역병의 증상은 발열, 설사, 인두염, 특히 농포성 발진 증상기록으로 보아 천연두로 보는 시각이 많다.
5-4-3. 안토니누스 역병의 진원지
파르티아 전쟁이 끝나갈 때쯤 BC 165년 로마는 중국 한나라와 실크로드가 아닌 로마 해상 경로를 통한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학자들은 이때 안토니우스 역병이 로마에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역병과의 전쟁을 치르며 정신이 없던 마르쿠스에게 또 다른 전쟁이 그에게 닥친다.
5-5. BC 166년 경~ 180년: 1차 마르코만니 전쟁
2세기 중유럽의 민족 대이동기로 인해 마르코만니인들이 로마영토인 다뉴브 강을 침공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1차 마르코만니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배경을 살펴보자.
5-5-1. 민족대이동(Migration Period)
민족 대이동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야만인의 이동이라고도 부르는 민족대이동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때 게르마니아인(게르만 족)에게 또 다른 게르만족인 고트족과 게피드족이 중유럽(현재 폴란드 비와강 Wisła)에 이주해 오면서 다른 게르만 민족에게 압박을 가했고, 이것이 연쇄적인 충돌과 이동을 일으키게 되어 민족대이동이란 결과를 낳게 된다.
5-5-2. 마르코만니 인의 다누비우스 강의 침공
그중 로마 국경에 있던 게르만족 일족 중 마르코만니(Marcomanni, 경계에 사는 자)인들이 생존을 위한 영토의 확보 필요성으로 파르티아 전쟁을 치른 데다가,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로마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로마 영토인 다누비우스 강(현재 다뉴브 강) 유역으로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것이 마르코만니 1차 전쟁의 시작이고 역병과 함께 마르쿠스를 죽을 때까지 괴롭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괴로움은 계속된다.
5-6. BC 169년: 공동황제이자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 사망
공동황제이자 동생인 베루스가 마르코만 전쟁에 참전했다 역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로써 안토니우스 역병, 전쟁, 국력쇠퇴 등으로 공동황제의 2명의 업무의 부담은 아우렐리우스 황제 혼자 지게 되었다. 그 뒤 마르쿠스의 로마는 베루스 사망 뒤 계속해서 전쟁을 치른다.
1차 마르코만니 전쟁은 로마영토인 북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 도시가 마르코만니인들에게 포위당했으나 171년 마르코만니인들을 퇴각시킴으로써 전쟁이 일단락 나는가 싶더니 173년 콰디족이 로마에 침공해 오면서 아우렐리우스는 원정대를 보내 174년 콰디족을 제압하고 175년 이아지게스족까지 굴복시켜 전쟁을 끝내려 했다.
5-7. BC 175년: 배신감을 느끼다, 카시우스의 반란
파르티아 전쟁, 부콜로이 전쟁의 승전 영웅이자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가장 신임하던 인물인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Gaius Avidius Cassius)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렐리우스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 모반을 꾀한 것인데, 여기에 아우렐리우스의 아내이자 왕비인 파우스티나가 개입한 설이 있다.
5-7-1. 파우스티나의 카시우스 모반 개입 설
마르쿠스 아내인 소(小) 파우스티나의 개입설은 자신의 아들 왕위를 위해 2가지의 방법으로 나뉜다.
1. 왕위 계승을 위한 도움 요청
파우스티나의 어린 아들 콤모두스의 왕위 계승 입지가 약하니, 카시우스에게 반란을 부추겨 아들의 왕위 계승을 도와달라는 설득의 설이다.
2. 잠재적 왕위 경쟁자 제거
이 또한 파우스티나의 아들의 왕위계승과 관련 있다. 당시 카시우스는 부콜로이 전쟁을 위해서 받은 군사 권임인, 오리엔트의 최고 지휘관과 임페리움이라는 왕의 권력을 받아서 군사를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 그 주변국의 지지를 받는 인기인이기도 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위임받고, 주변국과 친한 그는 또 하나의 강력한 배경이 있었는데, 멀지만 일단 왕가 후손이었기에
당위성이 콤모두스보단 부족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다.
만약 마르쿠스가 죽은 뒤 카시우스가 강력한 군사력과 능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계자 문제로 자신의 아들과 경쟁하게 될지도 모르니, 남편인 마르쿠스가 살아 있을 때 카시우스를 반란을 부추겨서 마르쿠스의 손에
반역죄로 카시우스를 제거하여 어린 콤모두스를 왕으로 만들려는 설이 있다.
아무튼, 마르쿠스는 카시우스에게 배신당한 충격도 컸으나 자살로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말하며 마지막까지 항복을 종용하였으나 헛소문임을 깨달은 다른 카시우스의 동료에게 카시우스가 살해당함으로써 아우렐리우스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5-8. BC 175년 경: 왕비 파우스티나의 죽음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소 파우스티나(小- Faustina)는 카시우스의 모반 때 대동하여 시리아로 가던 중 병사하게 된다.
5-8-1. 왕비 제거 설
병사라고 하지만 아우렐리우스가 앞에 언급한 카시우스 모반에 가담하게 한 사실을 알고 왕비를 제거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파우스티나가 단 한 명의 유일한 왕비였으며 14명의 자식도 두는 것으로 보아 이 독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쨌든, 마르쿠스에 마음은 배신당한 고통에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은 슬픔까지 더해졌다.
5-9. BC 178년: 끝나지 않은 전쟁, 2차 마르코만니 전쟁
177년 마르코만니족은 이주금지라는 로마의 압박에 반감을 품고 또다시 난을 일으킨다. 그래서 178년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마르코만니족 뿐만 아니라 다시 콰디족도 로마를 공격해 오며 전쟁이 계속되었다.
5-10. BC 180년: 평온하게 잠들지 못하다
BC 180년 03월 17일 아우렐리우스는 2차 마르코만니 전쟁 중 역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전쟁이란 이토록 불행한 것일까.”
6. 요약
1. 명상록이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적 깊은 생각이 담긴 책.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간단 이력
121~180년 제16대 로마 황제. 스토아학파의 철인왕이자, 로마 전성기를 이끈 왕
3. 명상록 집필 시대적 배경
외세 침략 전쟁과 역병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집필.
7. 나가며
책을 좋아하고 내성적이며 조용한 성찰가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평온과 평화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끝없는 전쟁, 기아, 역병, 배신, 죽음과 나뒹구는 삶 속에서 살았다.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그는 전쟁 속에서도 조용히 글을 쓰며 삶에 대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생각을 적은 것이 바로 명상록이다.
다음 편에는 명상록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스토아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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